
스노우볼
뱌누
가끔 그런 꿈을 꾼다.
해룡의 구슬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꿈을.
그 세계에 있을 적 내 얼굴을 잊었던 것처럼, 그 세상에서 만났던 인연들을 잊는 꿈을.
무슨 일인가 싶어 그 세계에서 받은 아공간 팔찌를 들여다보니, 물건들에 왠 꽃들이 한가득 피어나 있는 거다.
낡고 쓰지 않아서 이끼가 낀 것도 아니고 말이야, 문득 드는 황당함에 꽃 한 송이를 꺾어 관찰해 보자니 그것은 물망초였다.
물망초의 꽃말 잘 알지. ‘나를 잊지 마세요.’. 그리스 로마신화 덕분에 유명해졌잖아.
그런데 잊지 말아 달라면서 왜 내 기억 속에서 자꾸만 사라지는 걸까.
그런 원망을 담아 아공간 팔찌를 쥐고 중얼거리고 있자면, 내 답에 응답이라도 하듯 캡슐기계가 자동으로 열리며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 캡슐 안으로 홀린 듯 들어가…
그 세계를 다시 만나.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꿈을 꾼다.
다정하고 온전한 나로 시작하여, 나를 마중나온 어린 아이에게 틱틱 거리지 않고.
메이블 상회에 도착하면 어르신과 사무관에게도 조금 더 정중하게 대하는 것이다.
하여 지하수로에 다다랐을 때는, 가장 빠른 지름길로 달려가 아이를 구하고, 유품을 챙긴 뒤 곧장 떠날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인퀴지터와는 결국 싸울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결국 마음의 문을 열게 될 것이다. 그 아이는 여즉 미숙하고 여리며, 간단한 사건만으로도 쉽게 평범한 이에게 동경할 사유를 만들어내곤 하니까.
하지만 그 다음은.
아마 숨지 못하겠지. 이미 더럽혀진 손. 그 아이만 사람을 죽이도록 내버려 둘 순 없었다. 더군다나 소환될 악마는 드래곤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 다음은…
“…아.”
자신이 없어.
또 다시 지하수로로 내려가 그런 일을 겪을 자신이 없었다.
그 모든 일을 다시 해낼 자신이 없어 결국 난 모든 이들의 얼굴을 잊어갈 수밖에 없으리라.
그 결과로 받은 타타라에서의 첫 번째 훈장이 지나치게 무거웠다.
그건 내 것이 아니었으니.
훈장과 사례품을 건네주던 이들의 얼굴을 아직 기억한다.
옷에 붉은 십자가가 수놓아져 있던 치료사, 그리고 곰을 닮은 샤기족 모험가였던가.
그들은 내게 말했다. 모두를 대신하여 감사한다고. 던져오는 것을 얼떨결에 받은 바람에 그 무게를 여실히 깨닫고 말았다.
이건 내 것이 아니었으니.
어쩌면 그리 외면해왔으니 그곳에서 가져온 물건들이 빛바랜 외침을 부르짖는 것도 당연하리라.
가끔 이런 말도 안 되는 꿈을 꾸고, 일어나 배게를 적시 것 또한 당연하리라.
이제는 거의 멀쩡해진 다리도, 추위나 더위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 또한 당연하리라.
그 모든 것이 내 것인 동시에 내 것이 아니었으니.
그럼에도 받아들이고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최선임을 당연하게도 알고 있어서.
담배를 피우지 않으려 당근 스틱을 물고 나는 작업을 이어나가곤 했다. 바랜 종이에 물망초가 피어나는 것도 모르고.
언뜻 궁금해지곤 하였다. 그쪽은 이쪽 세상과 시간의 속도가 다르니, 그곳의 나는 어쩌면 잊혀졌을까. 아니면 여전히 나를 그리고 기억하는 이들이 남아있을까.
가슴께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이따금 목이 메어오는 것을 그들도 느끼고 있을까. 다만 알 수가 없어 그만 눈을 뜨고 이불을 개었다. 우울의 늪에 빠지기에 침대는 너무나도 달콤한 독이었다.
오늘도 잊혀가는 것들을 그대로 내버려둔채, 환한 웃음을 되돌려줄 시간이었다.
-전속 치료사, 곰 샤기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