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쪽 해풍이 데려온 사람
아타카
서부 해안은 바닷바람이 유독 소슬한 곳이다. 다른 해안들도 바람이 차기로는 뒤지지 않지만, 서부는 유달리 암초와 섬이 많고 한랭한 해류가 맴돌아서인지 바닷바람의 세기며 매서움이 궤를 달리 했다. 게다가 갯벌이 물과 소금기를 흠뻑 머금어 바닷바람을 좀 맞다 보면 어지간히 곧고 빳빳한 머리칼을 지닌 사람도 며칠 지나지 않아 고수머리가 되곤 했다. 아, 물론 그렇다고 결이 좋아지냐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소금기를 먹는 바람에 빡빡하게 떡이 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런 의미에서, 뱃사람들의 위생 관념이 그다지 좋지 못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가뜩이나 배에다 실어 나를 물자들이 미어터지다 못해 배의 공간이 모자랄 판이건만, 어찌 씻을 물을 따로 실을 수 있겠는가? 차라리 식수만 넉넉하게 챙기거나-이마저도 물이 상해버리면 그 항해는 망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차라리 술을 식수 대신으로 챙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아니면 다른 생필품들을 챙기거나. 사방이 물이라 해도 바닷물을 마시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을 것이라는 판단이기도 했다. 아니면 비가 내릴 때 빗물을 받아서 씻자는 심산도 있었고. 실제로 날이 그리 궂지 않고 비가 넉넉히 내리면 선원들이 일제히 갑판으로 뛰쳐나와 비누를 들고 온몸을 벅벅 미는 진풍경도 구경할 수 있었다. 일종의 생존을 위한 취사선택이었던 셈이다.
물론 그걸 안다고 해서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였다. 청년은 몇 달째 이어지는 항해에서 꼬질꼬질해진 저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몸부림을 쳤다. 이 정도로 못 씻는 건 좀 너무한 것 아니야?
자신이 유난히 깔끔 떠는 축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야 청년도 좀 귀찮다 싶으면 씻는 과정 따위야 과감히 건너뛰고 며칠을 꼬질꼬질하게 지낼 때도 있었단 말이다. 그 정도야 다른 사람들도 자주 하는 일이 아니던가? 청년은 자신이 깜깜 어렸을 적에 씻기 싫다고 어른들 손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나마 주기적으로 씻는 버릇을 들인 것도 본래의 꿈이었던 모험가 대신 상인의 길을 택하고 난 뒤부터였다. 요는 손님들이나 거래처에게 보이는 이미지가 중요하니 언제고 책잡힐 데 없는 말끔한 모습으로 상대를 맞이할 수 있도록 몸을 청결히 하라는 조언을 받아들인 덕분이었다. 실제로도 효용을 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비누라는 것이 제법 가격이 나가는 물건이지만 대상단 쯤 되는 곳이니 사환에게도 일을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소량이나마 비누를 나눠주며 겉보기에 신경을 쓸 수 있는 것이리라. 그렇게 청년은 어릴 적의 꼬질꼬질한 동네 꼬맹이에서 말쑥한 청년으로 탈바꿈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야기가 길었지만, 어쨌거나 청년의 고민은 최근 배를 타게 된 이후 떡 지고 굳어버리고 엉킨 머리에 있었다. 한번 씻는 버릇을 들이고 나니 조금만 찝찝하다고 느껴도 강렬하게 청결을 향한 욕구가 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본래도 굽슬굽슬 거리던 머리칼이 소금기 머금은 바닷바람을 맞고 나니 한층 더 꼬부라지게 변한 것이다! 도무지 빗고 싶어도 빗지를 못할 악성 곱슬이 된 청년이 심히 슬퍼했다. 도대체 귀족들은 왜 인두 따위로 머리를 지져서 곱슬머리를 만든단 말인가? 바닷가에서 며칠 바람 좀 맞고 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데.
어릴 적 타타라를 방문한 모험가에게 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그리고 그 이후로도 좋아했던 제 고수머리라지만 이럴 때면 어쩔 수 없이 환상이 깨지고 마는 것이었다. 제 눈만큼이나 푸르고 제 머리칼처럼 굽이치는 물결로 가득 차있다던 바다는 찝찝한 소금기와 악성 곱슬만을 선사했다. 통탄할 노릇이다.
분명 처음 바다에 왔을 때만 해도 벅찬 환희와 장엄한 광경으로 어쩔 줄 몰라 했던 때가 있던 것도 같은데, 어쩌다가 이 모냥 이 꼴이 된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청년은 수평선을 끊어내는 뱃머리에서 한숨을 푹 쉬었다.
“어이, 애송이. 아직도 부러진 빗 가지고 애쓰는 거야?”
“애송이 아니래도요. 나이 다 찬 지가 언젠데….”
“애송이 아니라고 떽떽거리면 죄 다 애송이지.”
전직 해적, 현직 죄수이자 여전히 함선의 선장인 바람손 수리야가 킬킬 웃으며 청년의 등짝을 호되게 후려쳤다. 어디 그렇게 애송이 취급이 싫으시거든 등짝이나 한 번 보자꾸나! 등짝이 무슨 상관인 데요! 아파요! 어른이면 이 정도는 애교로 넘어가!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배 위에서 지난 며칠 간 야무지게도 말을 튼 두 사람이 함께 킬킬거렸다. 처음에는 뱃사람다운 거친 화법과 포르젠과 자크라티를 위시한 서부 해안지방 특유의 강한 사투리 탓에 낯설기도 했는데, 막상 친해지고 보니 이만큼 이야깃거리도 배울 점도 많은 사람이 또 없었다. 상행을 다니는 배를 자주 털었던 시절인지 유달리 상선과 장삿길에 대해 밝은 점이 그러했다. 물론 그 내용이 써먹기 좋으냐고 묻는다면, 그건, 글쎄올시다.
“그러게 배 타면 씻는 건 일찌감치 포기하라니까….”
“이 정도로 심할 줄 몰랐단 말이에요….”
“그래도 지금은 제법 사정이 좋아진 거다? 예전에는 배에 물 찰 일 있냐고 식수도 진즉 다 마셔 없애곤 했어.”
“대체 어떻게 그러는 건데요….”
“대신 주酒님이 있잖냐.”
바람손은 뱃사람들의 친구인 럼과 맥주가 담긴 플라스크(하나도 아니고 여럿이었다.)를 슥 들어 올리며 한 모금 마셨다. 긴 항해 속에서도 웬만큼 상하지 않다 보니 절로 친숙해지는 것들이기도 했다. 청년도 예외는 아니었고.
“진짜로 그냥 술 마시고 싶어서 핑계 댄 건 아니죠?”
“아니야, 인마. 네가 상선을 타는 게 처음이라서 모르는 거지. 상선이고 사략선이고 함선이고 뭐고 전부 공평하게 술 마신다. 아, 돈 깨나 있는 놈들이면 자랑이라도 하는 건지 과일 주스를 먹긴 하더만? 뭐 이빨 줄줄이 빠지고 입 안에서 피 나고 싶지 않으면 그냥 그거 먹는 게 제일 좋긴 한데.”
“네? 그런 병도 있어요?”
“과일이랑 채소를 너무 오래 안 먹으면 그렇게 되지. 너도 이제 알겠지만 배에는 신선한 음식이 잘 없잖냐? 나와도 항해 초반에 사나흘 좀 나오고 말지.”
“그야 그렇긴 한데….”
청년은 셋째 날 저녁 즈음부터 줄창 나오기 시작했던 돌덩이처럼 딱딱한 비스킷과 어쩐지 퀴퀴한 냄새가 나는 치즈 덩어리를 떠올리고 진절머리를 냈다. 아무리 바다에서 신선 식품을 먹기가 힘들다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것 아닌가? 심지어 비스킷은 씹기조차 힘들어서 망치로 부숴야 하는 건가 고민이 되었을 지경이었다. 육지의 비스킷이나 건빵도 말도 안 되게 딱딱했지만 이 지경은 아니다! (결국 청년은 럼주에다가 비스킷을 불려먹는 짓까지 해야 간신히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왜 그런 거예요?”
“우리도 이유는 잘 모르는데… 거 뭐라더라. 모험가한테 들었는데 이름이 기억 안 난단 말이야. 워낙 생소해야 말이지. 하여간에 과일이랑 채소에만 있는 바이… 뭐? 하여간 그런 영양이 부족해져서 걸린다고 하던데. 먹으면 낫는다더라. 그러니까 너도 육지 가면 과일이랑 채소 잘 먹어라. 고기부터 먹지 말고.”
마치 어린 아이들을 놀리는 것만 같은 장난스러운 어조에 청년이 불퉁하게 답했다.
“당연하죠. 이제는 염장된 생선도 지겹다고요. 고기도요. 너무 짜요.”
“땅에만 붙어 있다 온 놈들이 다 그렇긴 한데 넌 유독 까탈스럽구만?”
“저도 제가 이 정도로 까탈스러울 거라고 생각을 못 했는데 말이죠.”
청년이 한숨을 푹 쉬었다. 말 그대로, 그는 한평생 살아왔던 타타라를 떠나기 전만 해도 자신이 이토록 무언가를 일일이 가려 따지고 예민하게 굴 줄은 몰랐던 탓이다. 아니, 기실 이 배에 올라타기 전만 해도 추호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다! 그는 상선들을 호위하기 위한 배에 탔을 때만 해도 풋내기들이 으레 가질 법한 기대감과 흥분으로 가득 차있었단 말이다!
“그래도 멀미 안 하는 게 어디야, 인석아. 적어도 사람 구실은 하잖냐.”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이에요….”
“멀미에 한 번 시달리고 나면 멀끔한 꼴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못할 만큼 골골대는 녀석들도 많거든. 머리가 떡 지고 곱슬머리가 되든 말든 신경도 못 쓸걸.”
바람손은 그리 말하며 안쪽의 선실에 흘끔 눈길을 주었다. 청년은 그 말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깨닫고 킥킥 웃었다. 지금 즈음 선실 안에서 멀미로 반쯤 시체가 되다시피 한 소년을 가리키는 것일 테다. 10 갈을 걸어도 좋았다.
화제 속 회색 머리칼의 소년은 기사라고 들었건만 어찌 그리 뱃멀미가 심한 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얼핏 봐서는 저보다 서너 살 차이 밖에는 안 나는 것으로 보이는데 수십 해는 더 묵은 것 같은 눈을 지니고 빼어난 자태와 검술을 지녔더랬다. 다만 행동이 어려서인지 그리 나이가 있어 뵈지는 않았지만. 함에도 소년에게서는 어떤 근사함 같은 것 또한 서려 있었던지라, 어쩔 수 없이 시선이 가기도 했다. 배에 오르기만 해도 멀미에 안색이 창백해져서는 휘청거리다 못해 선실에서 내내 누워 지내는 것이 다소 의외였던 것뿐이지.
아, 그리고 또 하나. 소년은 어쩐지 자신이 어릴 적에 사환 노릇을 할 때 만났던 모험가와 꽤나 닮아 있었다. 물론 인상은 달랐지만, 이목구비가 제법 흡사하여 나이 차 많이 나는 동생이나 자식뻘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예닐곱 살 즈음 딱 한 번 보았던 이라 해도, 워낙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인지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사람도 꼭 같은 잿빛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고 말이다.
워낙에 유명하던 악마 사냥꾼이었으니, 혹시 아느냐 물어볼 심산도 있었는데… 웬걸. 소년의 뱃멀미가 그리 심할 줄 누가 알았겠나. 질문은커녕 배에 타자마자 그날 먹은 식사 메뉴를 생생하게 알게 해주곤 선실에 콕 틀어박히는 바람에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나마 바람 쐬러 나와서도 수평선만 멀거니 쳐다보다 악마 몇 마리 잡고 도로 들어가 버렸고 말이다.
“그 사람은 오늘도 잔대요?”
“언제쯤 배에 적응할지 모르겠다. 세상 돌아보고 싶다고 선장 구할 때는 언제고 저렇게 맥을 못 춰서야.”
바람손은 정말로 딱한 것을 보듯이 혀를 끌끌 찼다. 소년의 곁에서 붙어 다니는 두 기사들이 봤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호랑이도 제 말하면 나타난다는 양, 선실 저편에서 이제는 꽤나 눈에 익은 잿빛 그림자가 보였다. 화제의 그 소년이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속은 좀 괜찮나요?”
“…약초 씹으니까 좀 나아요…. 좋은 아침입니다.”
소년, 파우스트는 척 보기에도 속이 메슥거리는 사람의 낯이었다. 뱃멀미를 완화 시켜주는 약초를 씹었는데도 저런 낯이라니, 당최 얼마나 멀미가 심하면 저러나 싶기도 했다. 평소 같았으면 큰 거래에서나 만났을 기사임에도 불구하고 측은하게까지 느껴지는 낯이었다.
“이러면서 싸울 때는 어떻게 날아다니나 몰라.”
“차라리 판자 밟고 뛰는 게 더 나은 것 같아요….”
“그러게 바다는 지겹다던 놈이 객기는 왜 부려서.”
“그치만요.”
“알아.”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의외로 파우스트와 바람손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인 것 같았다. 그들에게서는 어떠한 거대한 사건을 공유한 이들의 유대감 같은 것이 느껴지곤 했다. 기사와 떠오르는 상단 주인의 인연이라.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청년은 모처럼의 기회가 다가온 김에 궁금한 것들을 묻기로 마음먹었다.
“저, 파우스트 씨?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네. 무슨 일… 우윽.”
이런. 좀 나아진 건가 싶어 물어봤더니 도로 멀미를 하기 시작했다. 이 즈음 되니 기사고 뭐고 측은하기만 할 지경이었다. 파우스트는 한참 동안 메슥거리는 속을 견디고 가라앉힌 뒤에야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질문이란 게 뭔가요?”
“음, 혹시 ‘악마기사’라고 들어보셨어요? 전쟁 끝나기 전에 악마 사냥으로 유명한 모험가였거든요. 지금은 소식도 들려오는 게 거의 없어서 기억 못하시는 분들도 많지만….”
그 말에 바람손과 파우스트의 눈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그랗게, 동시에 뜨였다. 청년이 잠시간 자신이 질문을 잘못한 것일까, 하고 고민하게 만들 정도의 반응이기도 했다.
“알아요.”
이윽고 이어진 답과 부드럽게 풀어진 어리고 말간 낯에서 괜한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청년이 알게 모르게 한숨을 폭 쉬었다.
“자크라티에서 악마기사를 모르면 간첩인데.”
“하지만 동부 쪽에서는 그다지 반응이 영 안 좋았거든요. 저까지 괜히 물었나 싶을 정도였단 말이에요.”
“그건 동부 놈들이 은혜도 모르는 멍청이들이라서 그래.”
코웃음과 함께 신랄한 비평이 이어지자 그 은혜도 모르는 동부 출신인 파우스트가 허허 웃었다. 자신으로서도 동부에 소문이 어떻게 퍼지면 그리 되나 의아할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악마기사를 알긴 해요. 어쩐 일로 물으시는 건가요?”
“저 어릴 적에 그분을 뵌 적이 있는데, 음… 당신이 악마기사와 정말 많이 닮아서, 혹시 친인척이나 아는 사이가 아닐까 했거든요. 정말 사소한 궁금증이었어요.”
혹시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덧붙이는 꼬리는 호기롭게 물은 것에 비해 소심해 보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그런 청년을 두고 저들끼리 쑥덕거렸다.
“…너냐, 아니면 요백 그 녀석이냐?”
“그레트헨이요. 여기 와서 얼마 안 되었을 때.”
“넌 또 용케 기억을 한다?”
“그럴 일이 좀 있었거든요.”
인상적이라면 인상적이었지. 당시의 그로서는 이해하지 못했던 일이기도 했다. 처음 이 세계에 온 이래로 내내 날 세운 태도-컨셉-을 유지하던 이가 아이에게는 험한 말 한 번 않고 바다의 낭만을 노래해주었으니 말이다. 바다는 뱃멀미 탓에 꺼리는 저조차도 어릴 적에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 동경을 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그날 이후 처음으로 굳어버린 심장이 조금이나마 녹은 날이 아니었을까.
바람손은 그 이야기가 딱히 궁금한 기색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아이들에게는 이래나 저래나 상냥한 사람이었으니 그랬겠지 하고 넘기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악마기사’였을 적에도 애들에게는 약하다는 것을 알고는 금세 히죽거리고 치댔던 이였으니.
“아는 분도 맞아요.”
“…아! 그분은 잘 지내시나요?”
다만 이것이 지금 중요한 것은 아닐 테다. 파우스트가 다시 답을 돌려주자 청년이 화색을 띠었다.
“네. 악마가 사라지고 나서는 고향 땅으로 돌아가셨어요.”
“은퇴하신 거였구나. 하긴. 악마 잡는 걸 주 업무로 삼으셨다 했으니까….”
그 짧은 설명으로도 청년에게는 금세 납득이 되었는지, 청년은 꽤나 순순했다. 편리하게도 알아서 속사정을 덧붙여 주었으니 말을 꾸미느라 쩔쩔맬 필요도 없지 않은가.
“잘 지내고 계셔요.”
“다행이에요. 종전 이후로 통 소식을 못 들어서….”
“충분히 그럴 법 하죠. 어릴 때 뵈었다 하셨는데, 인상이 많이 깊었나 봐요.”
청년은 그 이야기에 머쓱히 뺨을 긁적였다. 어릴 적에 꾼 환상적인 꿈을 다 크고 나서 설명하는 이들이 부끄럼을 타듯 수줍기만 한 반응이기도 했다.
“사실 그분이 제게 바다 이야기를 해주셨거든요. 바다는 어떻게 생겼냐고 물으니 제 머리칼처럼 구불거리는 물결로 가득 차고 제 눈만큼 파랗다는 거 있죠.”
그 말 때문에 모험가가 되어야지, 했는데 제가 몸 움직이는 데엔 영 재주가 없었어요. 그래서 상인이 된 거기도 하고. 청년은 보기보다는 수줍음이 많은 것이 아니라, 여전히 설렘으로 가득 찬 쪽에 가까웠다. 낭만이 홀린 이들이 으레 그러하듯 사랑에 빠진 이들과 비슷한 낯을 하고 있기도 했다. 정확히는, 어떤 것에 푹 빠져버린 이들의 얼굴 말이다. 손상되지 않은 순수의 것.
“그 양반은 가고 나서도 사람을 홀리네.”
정작 가장 매료되었던 바람손이 툴툴거렸다. 비밀을 지키는 이들 특유의 근질근질함이었다. 무어, 이미 가고 없는 사람이 이런 걸 어찌 아나 싶지만. 동시에 타이밍이 안 맞았다곤 해도 가기 직전까지 제게 입도 벙긋 않고 비밀을 지킨 이에 대한 심술이기도 했다. 그래도 그동안은 좀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사람 서운하게. 끝까지 꽁한 생각은 덤이었고.
함에도 해적들이란 죄 다 제 보물 앞에서는 무엇이건 할 수 있는 족속들 아니었던가? 대상단의 상주가 되었다고 하여 그 시절을 잊은 것도 아니고.
“그럼 지금부터 제대로 봐두고 돌아다니면 되겠네.”
“그쵸?”
새파란 눈이 곱게 휘며 웃음꽃을 흠뻑 피워냈다.
수평선 너머의 색채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