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날의 슬픔
보쯔
휴렌델의 마탑이 위치한 호수.
인적이 드문 가장자리를 향해 물그림자가 비치었다.
조용히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검은 그림자가 뭍 위로 나오며 사람만한 무언가를 끌어올렸다. 짐짝처럼 끌어올려진 물체는 마법사의 로브를 걸친 명백한 사람이었다.
"죽었나?"
"살아있습니다…."
들여다보던 이가 서툰 억양으로 물음을 던지자 다 죽어가는 회답이 돌아왔다.
나름 체력에 자신이 있던 마법사는 장시간 호수 아래를 훝고 다녔음에도 멀쩡해 보이는 상대방을 보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숲의 주민.
언어마저 다를 정도로 폐쇄적인 성향으로 소수 부족에서 간헐적으로 약간의 교류가 있었던 것은 알고 있었다. 교류라 부르기 민망한 거래 정도로 호전적인 부족을 만난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기에 미지의 영역으로 남은 영토이기도 했다.
이들과의 거리감이 이토록 가까워진 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손님들에까지 생각이 가지를 뻗었다.
여러가지로 특이하고 특별했던 손님들의 방문은 오래 몸 담고 있던 마탑에서도, 아니 마법사의 길을 걸은 이후 겪은 그 어떤 사건보다도 기상천외했다. 개개인의 특성은 말할 것도 없고, 그로 인해 벌어진 사건과 영향력은 휴렌델에 마탑이 세워진 이래 가장 커다란 분기점이었으니까. 그 손님으로 인해 발견한 위험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고 들킨다면 마탑이 쫓겨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재앙 그 자체가 될 수 있었던 일이었으므로.
그 모종의 사건 때문에 마탑은 내부 회의를 거쳤고, 몇 가지의 조치가 취해졌다.
그 중 하나로 마탑의 보강 외에도 정기적으로 호수 아래를 탐사하고 관측하는 일이 추가된 것이었다.
다만 이 일은 초반에 적임자를 찾는데 난항을 겪었다. 호수 아래를 살펴보려 마법을 쓴다면 단번에 마력 부족으로 다들 드러눕고 말 것이며 그 전에 탐색을 위한 마법 자체를 할 수 있는 인원이 부족했다. 여기에 갑작스레 늘어난 마도구 생산이 겹치자 도저히 인력을 빼내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모험가 길드의 사람을 쓴다면 만약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해야 할 변명으로 골치가 아파질 수 있고.
이런저런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마탑주의 눈에 들어온 곳이 대산림이었다.
이번에 새로이 대족장으로 추대된 이는 외부와의 교류에 관대했다. 정확히 무슨 거래가 성립되었는지는 기밀로 취급되었지만 이 일에 대해 그들도 협조적인 태도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숲의 전사에게 의뢰 형식의 협상이 이뤄졌다.
마탑으로서는 가장 최선의 방책이었다. 숲의 전사들은 뛰어난 실력의 사냥꾼이었고 무엇보다 낮은 확률이라도 모종의 사건이 재발했을 시 신전과의 접점이 없을 외부인이라는 것이라는 점에서. 남은 것은 마탑쪽에서 파견될 인원이었다. 물 속에서 움직이며 마법적 조사를 겸하는 것이 꽤나 체력을 요구한다는 점을 감안하여 발탁된 몇명의 마법사가 교대로 작업을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임무 내용상 정확한 사실은 퍼지지 않았기에 마탑에서 위험한 사고를 친 마법사를 호수 아래에 수장시킨다는 괴담이 돌기는 했지만 언제나처럼의 기행으로 넘어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하며 상체를 일으키는 마법사의 눈 앞에 손이 내밀어졌다. 숲의 주민이 남은 손을 내밀어 준 것이다.
부럽다. 저 완벽하게 멀티태스킹에 최적화된 신체 구조라니. 해야 할 일에 비해 항상 손이 모자라다 여기는 마법사로서 언제나 처럼 부러운 눈길로 사냥꾼을 바라봤다. 그도 잠시, 문제를 일으킬 생각은 없으므로 순순히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킨 마법사는 이르게 끝난 작업에 잠시 시간을 헤아렸다.
다행이 이번에도 호수에 문제는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다행인 일이었으나 동시에 보고서에 쓸 내용도 없다는 것이었다. 후엔 분명 마도구 생산에 징집될 것이 뻔할 일이었고. 한숨 돌리게 되었다고 해도 마탑은 매분 매초 바빴으니 자명한 사실이었다. 호수 밑바닥을 찍고 왔으니 힘들다고 말해도 들어줄 이가 없을 것이 뻔하기도 했으니까.
"공부하러 가요."
말을 꺼내는 숲의 주민의 얼굴이 기대로 물들었다. 공부, 정확히는 서로의 언어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애초에 임무에 선출된 마법사는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어느 정도 대산림 고유의 언어를 할 줄 알아야 의뢰 진행 자체가 가능했으니 말이다. 예상 못한 지점이라면 그들이 외부의 언어는 물론이고 바깥 세상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저 미지에 대한 동경, 탐구심 정도로 받아들인 마법사는 기꺼이 시간을 할애하기로 했다. 대산림과의 교류는 마탑에 있어서도 커다란 이득이라는 점도 있었지만 더 큰 지분은 본인의 탐구심을 채울 욕심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이 일은 좋은 명분이 되어줄 터였다.
의외로 그들의 열정은 생각보다 컸는데 공부하는 시간이 쌓이자 그 이유를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그들이 궁금해하는 전사의 특징이 유별났던 까닭이었다. 반으로 나뉜 두 가지 머리색, 이라는 단어 만으로 대번에 떠오른 얼굴이 있었으니까. 행색도 행동도 특이했던 사람. 커다란 키와 무뚝뚝한 표정 탓에 첫인상부터 위압감을 느끼게 한 기사였다. 게다가 유혈로 뒤덮인 강렬한 인상 덕에 마법사에게 그는 위험한 인물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다만...
"제안에 대해 생각해봤어,요?"
상념을 가르며 물음이 파고들었다.
가르쳐 준 단어를 곧잘 쓰며 아직 어색한 억양을 제외하고는 능숙하게 회화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되자 전달받은 제안이 있었다.
지내는 시간 동안 친해지려 노력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붙임성이 좋던 전사는 마법사의 가르침이 썩 나쁜편은 아니었는지 정식적으로 대산림에 초빙한 것이었다. 언어를 가르칠 선생님으로서.
대산림과 지속적인 교류를 원하는 마탑에서는 환영할 제안이었다. 그건 마법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제사장은 말할 것도 없이 조금이라도 그들과 대화-를 빙자한 연구-를 나눌 수 있다면 자원할 마법사가 수두룩 했으니까. 현재 맡고 있는 연구와 임무 때문에 잠시 답을 미루어 둔 것이었으므로 모든 인수인계를 떠넘긴 마법사는 이제 자유의 몸이었다. 물론 마탑 소속으로 정기적인 리포트를 써 낼 의무는 있었으나 마탑에서 해주는 지원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을 기점으로 호수 관측도 마무리되므로 마지막 보고서 작성 및 제출이 끝나면 당장이라도 출발 할 수 있다고 답했다.
확답을 받고 밝은 모습으로 헤어진 다음날, 안내역을 자청했다는 대산림-세르항 부족의 전사를 따라 숲에 들어섰다. 얼마 걷지 않아 주변은 울창한 정글로 변모해갔다. 당연하게도 땅의 상태마저 도시에 비해 무척 험한 편이었기에 따라가기에도 벅찬 상황이었다.
그 탓에 자신을 아디사라 소개한 길잡이의 수다에 간간히 화답만을 돌려주었다. 서로 언어를 배운 것은 같은 처지라 근래 귀에 익은 언어가 자연스럽게 들려왔다. 그의 말에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한 인물이었다. 그들의 언어로 '검은천둥뱀'이라 칭하며 그들이 섬기는 '산군'과 함께 경외시하는 자. 마법사를 안내하는 길잡이는 그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 하며 당시의 일을 자랑스레 설명하기까지 했다. 과연 인간이 맞을까 싶은 무위의 편린에 대해서도. 마법사는 자신이 숲에서 연구해볼 과제에 '검은천둥뱀'을 슬며시 올렸다. 그가 실제로 용사의 검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알기는 했다지만 그 활약상을 제대로 알고 있는 이는 적었다. 그러하니 이를 자신이 정리한다고 해도 나쁠 것은 없을 것이었다.
다음으로 귀담아 들을 것은 마법사의 거처였다. 부락과 멀지 않은 곳에 마련된 아담한 오두막이라거나 식량의 조달 사항이라던가. 어쩐지 전 화제로 인해 깜박하고 뒤로 밀린 기분이 들었지만 완전히 잊어버리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앞으로 자신의 생존을 책임질 사항들을 꼼꼼히 머리에 넣어두었다.
돌연 길잡이의 발이 멈추었다. 팔을 뻗어 마법사의 걸음도 그치게 하고는 우거진 수림 너머에 시선을 던졌다. 긴장되는 순간은 화제에 올랐던 거대한 뱀에 대해 떠올리게 하였다. 뱀이 아니더라도 온갖 맹수와 맹충이 거하는 곳이 대산림이 아니었던가. 몸을 사리며 작은 도움이라도 될까 수인을 맺던 마법사는 뛰쳐나가는 길잡이를 보며 기겁했다. 혼자두지 말라는 외침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가 다급하게 뒤를 쫓아가자 대화소리가 들렸다.
상대방이 누구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초반에 통역을 위해 동행하였던 소녀였다. 그 때 듣기로는 마카카라 불리던 소녀. 다급함이 깃든 목소리와 초조함을 비치는 표정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능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빠르게 대화를 주고받았으나 중간 중간 들려온 단어로 유추하기를 '아이들이 사라졌다.'는 정보를 건져낼 수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건에 오늘 하루가 순탄치 못할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짧고 어수선한 대화를 넘어 길잡이의 고개가 마법사에게로 휙 돌아갔다. 슬그머니 대화를 엿듣고 있었던 마법사가 화들짝 놀란 가슴을 진정 시키기도 전에 날쌔게 그 앞으로 다가온 길잡이가 손짓을 더하며 빠르게 말을 쏟아내었다. 무어라 하는 것인지 알아채는 것은 빨랐다. 사라진 아이들을 마법으로 추적할 수 있는 지에 대해 도움을 요청하는 건이었으므로.
앞서 추적하고 있던 숲의 전사들을 따라 마법사도 수색에 동참하게 되었다. 몇 번이고 추적 마법의 수인을 맺으며 아이들을 찾은 마법사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들이 부모를 찾는 중에도 이 아이들의 부모는 어디있기에 찾으러 오지 않은 것이며 중간 중간 들린 말로는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뜻이었다. 자신이 유괴에 관련된 것은 아닌지 식은땀을 흘리는 마법사에게 제사장이라 불린 이가 다가왔다. 도움을 주었으나 찝찝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던 마법사는 얼른 표정 관리를 하였으나 제사장은 알고 있다는 듯이 미소를 띄웠다.
"유괴는 아니니 걱정마시게. 아이들을 보호하려 하는 것이니."
유창한 말투에 놀라 바라보니 제사장-비비아는 천천히 비사를 풀어놓았다. 타 부족-비가볼에서 일어난 반란과 살아남은 아이들에 대해.
본디 대산림의 규율에 따라 연좌제로 처형당 할 아이들이었다. 이를 막은 귀한 손님 덕분에 목숨을 건진 아이들은 그 처지가 퍽 곤란했다. 본디 속해있던 부족에서는 반란의 씨앗인 아이들이 장성하여 그들에게 칼을 겨눌지 두려워 하였고, 각자 독립적인 부족들은 외부에게 배척적이었다. 이는 같은 대산림에 적을 두고 있다 하더라도 타 부족간에 전쟁이 일어날 정도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운이 좋은 아이들은 산군을 모시는 제사장에게 거두어질 수 있겠으나 그 숫자가 만만찮은 것이 문제였다. 보호자가 없는 어린 아이들이 숲에서 살아남기란 요원한 일이었고 살아남는다 하여도 그들이 있을 자리는 결코 평탄치 않을 터였다.
"비가볼 부족에 남아있기에는 아이들의 처우가 좋지 않을 것을 알았네."
이미 그들은 반란을 일으킨 이의 아이가 무슨 행동을 하고 무슨 말을 했는지 보고 들었으므로 눈초리가 곱지 않을 터였다. 우선적으로 그네들의 부족-세르항에서 보호하기로 하였으나 이쪽도 전쟁으로 인해 인력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담담히 읊조리는 말에 귀를 기울이며 마법사의 손이 분주하게 수인을 맺었다. 밝은 마력이 나비의 날개짓을 따라 흔적을 남기며 앞길을 일렀다.
숲을 헤메느라 상처투성이가 된 아이들을 안고 달랜다. 아직 부모의 죽음을 알지 못하는 나이대의 아이들도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아이들도 있었다. 그렇기에 아이들은 집을 찾아 뛰쳐나온 것이었다. 그렇게 하나 둘, 대다수의 아이들을 품에 안은 어른들이 자리를 비우고 시간이 흐른 만큼 인원도 줄어들었다.
아직 찾지 못한 아이가 부디 무사하기를 바라며 묵묵히 수색을 이어나갔다.
어른도 헤쳐나가기 어려운 길을 어떻게 그리도 멀리 나아갔을까. 귓가에 쏟아지는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물소리에 섞여 들리는 소리는 아이들을 찾으며 들은 울음소리였다. 서럽고 서러운 감정을 쏟아내는 소리.
아이의 삶을 이루고 있던 가장 커다란 조각이 떨어져 나갔다. 폭포의 소리가 익숙하게 눈물을 삼켰다. 이슬이 내린 자리에는 슬픔을 먹고 꽃이 피었다. 바위 사이 좁은 틈에 웅크려 그늘 아래 숨죽여 울고 있는 아이의 곁에는 앵초꽃이 피어있었다. 마력으로 희미하게 빛나는 나비가 꽃잎 위에 앉아 날개를 접었다.
고개를 들은 아이의 얼굴은 슬픔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것은 체념이었다. 상실을 알고 아이로 남을 수 없게 된 아이가 현실을 받아들인.
【아가.】
세르항의 제사장이 아이의 앞으로 다가가 자세를 낮췄다. 무릎이 땋에 닿고 고개를 숙이며 세 쌍의 팔을 펴 내밀었다.
아이의 부모는 제사장이었다. 그 때문인지 머리가 좋았던 아이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사랑으로 불러주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자신을 안아주던 품을 그릴 수 없게 되었음을.
그것을 인정할 수 없어 무작정 집을 찾아 나섰다. 자신을 따라 다른 아이들이 숲에 들어서는 것을 알았으나 멈출 수가 없었다. 이 슬픔을 내비칠 장소가 필요했기에 눈에 익은 장소가 보일 때까지 내달렸다. 그를 가능케 했던 것은 아이에게 남겨진 유산 덕이었다. 제사장에게 길들여진 표범. 아이가 태어날 적부터 함께 지낸 맹수가 아이를 태우고 내달려 그들의 집으로 내달린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고향은 이미 잿더미가 되어버린 후였다. 아이의 이웃들은 더이상 친절하지 않았으며 또래들은 부모의 손에 이끌려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흔적조차 낯선 이곳에서야 깨닫게 되고 그 빈 자리에 들이닥친 것은 사무치는 외로움 이었다.
아이의 앞에는 항상 사랑하는 이의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언젠가 자라 그 등 너머에 자리한 비바람을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아이를 지켜줄 든든한 등이.
그러나 그러기도 전에 사라져버린 자리로는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 힘든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쳤다. 상실은 아이를 혹독한 현실에 내동댕이치고 강제로 성장하게 만들었다.
【아가. 이리온.】
그런 아이들을 위해 어른들은 울타리를 만들었다.
가녀리게 피어난 꽃이 비바람에 뿌리 뽑히지 않도록.
아이들은 호의와 적의를 구분할 줄 알았다. 살금 고개를 든 아이의 눈에 다정한 눈이 마주했다.
다시는 들을 수 없는 목소리가, 안락한 품이 서럽고 서러워서. 차마 그 부름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내 제사장이 품에 아이를 안고 몸을 일으켰다. 서럽게 울던 아이는 지쳐 기절하듯이 의식을 잃었다. 그 모습을 보던 마법사는 남몰래 코를 훔쳤다. 눈에 뭐가 들어갔다고 궁시렁거리면서 작게 코를 훌쩍인 마법사가 몸을 일으킨 표범에 펄쩍 놀란 일은 작은 헤프닝이었다.
소란스러웠던 날이 저물고 별을 길잡이 삼아 돌아가는 길. 마법사가 가르쳐야 할 이들이 이 아이들이라는 말을 하며 제사장이 웃었다.
"대산림에 변화가 없이 옛 그대로였다면 이 아이들은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방황했겠지. 혹은 그 날 아이들의 부모와 함께 명을 달리했을 게야."
그러나 새로이 대족장이 된 에쿠아는 젊고 지혜로웠으며 올곧았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그가 존경하는 이가 지키고자 했고 지켜내었던 목숨이었다. 자리가 없다면 새로이 만들면 되었다. 대산림 너머의 문물을 살피고 아이들을 보살필 장소를 마련했다. 그를 도울 이가 곁에 있었기에 시행착오가 있다 하더라도 실행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바스락거리는 풀잎이 깔린 공터에는 깔끔한 목재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부락에 있던 오두막들보다 큰 건물은 지금껏 본 아이들을 전부 수용할 수 있을 크기였다. 그리고 어딘가 낯익은 양식이었다.
"바깥에는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위한 시설이 있더군. 그를 본 따 지어진 건물이라네. 그리고 이 아이들이 자라면 학교로 쓰여질 예정이지."
그리 말하는 제사장은 품에 안긴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도닥거렸다. 뒤따라온 표범이 발치에 자리를 잡았다.
은퇴한 제사장들과 늙은이들이 이 건물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여생을 보낼 걸세. 그리말하며 잔잔히 웃는 제사장-비비아는 어딘가 후련해 보였다.
그 웃음을 보며 마법사는 감동과 소름을 동시에 느꼈다. 아무래도 저는 쉬이 선생 자리를 벗어날 수 없지 않을까? 마치 수석 마법사에게 차를 권유 받았을 때가 생각나는 것은 본능의 영역이었다.
시간은 공평하게 흐르고 아침이 찾아왔다. 햇살이 비치자 아이들이 하나 둘 눈을 뜨고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슬픔을 덮는 것은 시간이었고 사랑을 잃을 상실은 새로운 사랑으로 채울 수 있다. 슬픔에 잠기고 그늘이 드리워져도 피어나는 꽃이 있듯이.

